무등산 주상절리
무등산에 올라가서
주상절리를 대하면
칠천만년의 풍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입석대가 그러하고
서석대가 그러하다
2012.12.29.
【유서석록에서 무등산 부분 발췌】
유서석록은 고경명이 나이 42세 되던 해(선조 7년, 1574) 4월 20일 당시 74세인 광주목사 갈천 임훈(1500~1584)의 초청으로 24일까지 5일간에 걸쳐 무등산인 서석산에 올라 지은 기행문이다. 그는 당시 날짜별로 무등산 곳곳을 등산하고 방문한 기록을 한문으로 상세하게 남겼다.
고경명은 서석산에 오르게 된 감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서석은 우리 고을 광주의 산이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하기까지 여러 차례 올라 관상하였으므로 매달린 듯한 벼랑이나 끊어진 바위 절벽이나 깊은 숲과 그윽한 시냇물 등에 내 신발 흔적과 발자국을 남겨 놓으려 해왔다. 그러나 노상 범연히 보아 왔기 때문에 묘리를 얻지 못했으나, 어찌 나무 하는 시골 아이나 소치는 동자 따위가 보는 것과 다를 바 있으리오. 홀로 가서 마음을 상해서 유의조(柳儀曹, 유종원을 지칭)가 남간에서 느낀 그런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산을 자세히 알았다고 말한다면 옳거니와, 산의 정취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아직 그렇지 못하다 할 것이다.
이제 다행히 임 선생의 뒤를 따라 산에 올라 눈을 씻고 다시 바라보게 되었으므로, 황홀하기 이를 데 없어 마치 회오리바람의 바퀴와 깃 우산 달린 수레를 타고 낭풍과 현포(곤륜산령에 있으며 신선이 살던 곳) 위에서 노닐게 된 것과 같으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 이에 일흥이 비동하여 소매가 떨치고 약속 장소로 향하여, 정오도 채 못 되어 이미 골짜기 어귀에 다다랐다.
입석대(立石臺)
석양에 입석암에 닿으니 양사기(중국 명나라 초의 문인이자 정치인)의 시에 이른바 십육봉장사라는 곳이 바로 여기로구나 싶다. 암자 뒤에는 괴석이 쫑긋쫑긋 쭉 늘어서 있어서 마치 진을 치고 있는 병사의 깃발이나 창검과도 같고, 봄에 죽순이 다투어 머리를 내미는 듯도 하며, 그 희고 곱기가 연꽃이 처음 필 때와도 같다. 멀리서 바라보면 벼슬 높은 분이 관을 쓰고 김 홀(笏)을 들고 공손히 읍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철옹성과도 같은 튼튼한 요새다. 투구철갑으로 무장한 듯한 그 가운데 특히 하나가 아무런 의지 없이 홀로 솟아 있으니 이것은 마치 세속을 떠난 선비의 초연한 모습 같기도 하다. 더욱이 알 수 없는 것은 네 모퉁이를 반듯하게 깎고 갈아 층층이 쌓아 올린 품이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듬어서 포개놓은 듯한 모양이다.
천지개벽의 창세기에 돌의 엉켜 우연히 이렇게도 괴상하게 만들어졌다고 할까. 신공귀장이 조화를 부려 속임수를 다한 것일까. 누가 구워 냈으며, 누가 지어부어 만들었는지, 또 누가 갈고 누가 잘라냈단 말인가.
노송들이 운치 있게 뒤덮고 있는 눈 덮인 죽녹정을 보기 위해 방문객이 올라가고 있다.
아미산의 옥으로 된 문이 땅에서 솟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성도의 석순이 해안을 눌러 진압한 것이 아닐까.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의 형세를 보니 뾰쪽뾰쪽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 가운데 헤아려 볼 수 있는 분명한 것이 16개 봉우리이다. 그 속에 새가 날개를 펴듯, 사람이 활개를 치듯 서 있는 건물이 암자이다. 입석암은 입석대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아 우러러보면 위태롭게 높이 솟아서 곧 떨어져 눌러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서 머물러 있기가 불안하기 그지없다. 바위 밑에 샘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암자의 동쪽에 있고, 또 하나는 서쪽에 있어 아무리 큼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